Hui ung
2012년 5월 11일 금요일
2012년 1월 8일 일요일
-2012 1. 8
소통, "누군가 스쳐지나가고 혼자 남겨진다"
최윤정 ● 미술비평, 대구미술관 큐레이터
주름 같은 기운에 펄럭이는 파란 침대(Nothing09,2010)가 있다. 그 주름 속에 어떤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지, 침대가 놓인 그 위치에서 공기층과도 협착해있는 주름의 표현이다.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고 외치는 무언의 사물들, 응시하고 인식하고 발견하는 자체에 대해서.
전에 한 지인과 '예술에서 과연 소통이 가능한가'에 대해 밤새워 논쟁한 적이 있었다. 우스개소리로 얼마나 소통이 안되면 마치 당연한 수식어처럼 소통, 소통 하겠느냐가 관건이었고, 결국 그리하여 우리의 대화는 '예술은 소통할 수 없다'로 귀결되었다. 우리의 의식, 기본적으로 편견을 전제로 하여 쌓아온 의식의 세계에서 같은 문화권이라도 무수히 논쟁이 벌어지고, 전쟁도 일어나는 형국을 보면 소통이란 비단 내용 전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분위기,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 더불어 개인의 심성 등 모든 복잡다단한 사태들을 결합시키고 고려해야 하며 그러한 노력을 거친 후라도, 결국은 각자의 이해에 따른 수용으로 점철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의 공과를 넘어서서, 그것이 소통의 과정이자 방식이라 우리 스스로 처리하고 있지 않은가. 일차적으로 예술은 주관적이며, 개인을 과하게 드러내야 하며, 아예 이성의 수준을 논외로 하고 감성의 수순으로 모든 것을 접합시켜야 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소통이라는 것을 어찌 보아야 할 것인가. 개개가 달리 수용하는 이해방식만으로 우리가 소통을 논할 수 있을까? 예술에서 내가 외쳐왔던 소통조차도 항시 타인을 강요하면서 꾀하는 계몽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반성한 바도 숱하다. 그래서 소통이라는 말 자체를 다르게 전유할 필요가 있다고 고민에 휩싸였던 기억을 바탕으로 나는 진희웅 작가의 '소통'에 주시하기로 한다.
"누구나 가볍게 지나치거나, 잠시동안의 거처이거나, 하지만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장수목과 같은", 그가 잠재된 기운, 흔적으로서 주름을 그려왔던 바는 사물과 사물이 만들어내는 묘한 주관적인 분위기에 감정이입을 한 바다. "흔적만이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작가의 의식은 기본 '소통이란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을 바탕으로 한다. 한참을 노력해보았지만 언어사용자들에게서 진정 무엇이 통했다 라든지, 서로 이해할 수 있었다 혹은 내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확신하기 실상 쉽지 않았던 경험이 작가에게는 많아 보였다. 그래서 소통의 대상과 방식을 사물과 보이지 않는 것, 행위 등 직접적 언어소통이 불가한 사물들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그의 작업들이 꾀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작가는 흔적에 대한 기운과 그것이 사물과 결합되는 묘한 분위기를 표현해왔던 페인팅 작업을 거쳐, 있건 없건 이해도와 밀접히,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의식을 차갑게 되짚으며 그냥 지나쳐왔던 것에 대한 감지를 주 내용으로, 일련의 설치작업들을 선보인다. '제발 나를 봐주세요 혹은 나도 있었다' _당신이 지나쳐왔던 '나', '나'의 관심, '나'만큼이나 조용히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사물들, 흔적의 분위기. 그냥 지나침 자체가 소통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그의 주목은 주목하지 않았던 것을 탐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직접적으로 그는 언급한 바 없다. 보기에, 작품의 형식과 표현에서 그가 단지 분위기를 그려내는 것만으로, 사물을 감지하여 그 존재를 드러내는 표현인 것만으로 그의 작업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형태와 이에 접근하는 작가의 의식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일련의 페인팅에서 보여주는 주름의 형태는 벡터적이거나 무정형의 움직임이 아니라 일정 흐름으로 그것이 주름임을 명시하듯 표현된다. 연계선 상에서 '구석', 공간의 형태를 일차적으로 잡아주는 기본 틀이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야와 관리에서 항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는 공간의 구석, 그것이 지닌 형태를 작가는 오브제 설치로 강조하고 있으며, 2011작 단채널 비디오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쓰레기 봉투에 주워담고 다시 펼치고, 또 주워담고 다시 펼치는, 결국 쓰레기 봉투가 헤지고 터져 담을 수 없는 형국에까지 의미 없는 반복행위를 지속하고 있으나, 왠지 마무리가 깔끔하다. 딱딱하고 규칙적인 표현과도 같은 그의 작업이 지닌 구조들은, 작가로 하여 미시적인 것들에 대한 관찰, 탐구, 감지, 발견을 꾀하게끔 하는 것으로 지금 현재 그가 예술가로 성장해가는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작가 진희웅과의 대화가 정말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불안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는 불편한 과정들, 진정 부르짖지 못하는 소통에 대한 아쉬움이 되려 그의 시선을 미시적인 것으로 보다 집중하도록 이끌었다고 믿는다. 허공에 내뿜는 거들먹거림보다도 탄탄히 자기 행위의 이유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구조적인 일관성이,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나, 분명 있었다. 더불어 나는 의미심장한 작업 내용을 떠나서라도 그만의 관찰력과 찰나의 발견, 이를 예술행위로 연결시키는 자기 근거에 대해서 그가 보다 확신을 지니고 서길 바라고 있다.
마지막으로 진희웅이 말해왔던 소통의 시작, '그냥 지나침'에 대해서,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길을 걷다 마주친 찰나, 한 순간에 대해서 과연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를 감탄케 하는 작품이다.
거리는 내 주위에서 귀가 멍멍하게 아우성치고 있었다.
갖춘 상복, 장중한 고통에 싸여, 후리후리하고 날씬한
여인이 지나갔다. 화사한 한 쪽 손으로 꽃무늬 주름장식 치맛자락을 살포시 들어 흔들며,
(..중략.)
한 줅 번갯불.. 그리고는 어둠!
-그 눈길로 홀연 나를 되살렸던, 종적없는 미인이여.
영원에서밖에는 나는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하련가?
저 세상에서, 아득히 먼! 너무 늦게! 아마도 영영!
그대 사라진 곳 내 모르고, 내 가는 곳 그대 알지 못하기에,
오 내가 사랑했었을 그대, 오 그것을 알고 있던 그대여!
- 보들레르, '지나가는 여인에게'<수록_악의 꽃>
<끝>
최윤정 ● 미술비평, 대구미술관 큐레이터
주름 같은 기운에 펄럭이는 파란 침대(Nothing09,2010)가 있다. 그 주름 속에 어떤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지, 침대가 놓인 그 위치에서 공기층과도 협착해있는 주름의 표현이다.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고 외치는 무언의 사물들, 응시하고 인식하고 발견하는 자체에 대해서.
전에 한 지인과 '예술에서 과연 소통이 가능한가'에 대해 밤새워 논쟁한 적이 있었다. 우스개소리로 얼마나 소통이 안되면 마치 당연한 수식어처럼 소통, 소통 하겠느냐가 관건이었고, 결국 그리하여 우리의 대화는 '예술은 소통할 수 없다'로 귀결되었다. 우리의 의식, 기본적으로 편견을 전제로 하여 쌓아온 의식의 세계에서 같은 문화권이라도 무수히 논쟁이 벌어지고, 전쟁도 일어나는 형국을 보면 소통이란 비단 내용 전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분위기,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 더불어 개인의 심성 등 모든 복잡다단한 사태들을 결합시키고 고려해야 하며 그러한 노력을 거친 후라도, 결국은 각자의 이해에 따른 수용으로 점철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의 공과를 넘어서서, 그것이 소통의 과정이자 방식이라 우리 스스로 처리하고 있지 않은가. 일차적으로 예술은 주관적이며, 개인을 과하게 드러내야 하며, 아예 이성의 수준을 논외로 하고 감성의 수순으로 모든 것을 접합시켜야 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소통이라는 것을 어찌 보아야 할 것인가. 개개가 달리 수용하는 이해방식만으로 우리가 소통을 논할 수 있을까? 예술에서 내가 외쳐왔던 소통조차도 항시 타인을 강요하면서 꾀하는 계몽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반성한 바도 숱하다. 그래서 소통이라는 말 자체를 다르게 전유할 필요가 있다고 고민에 휩싸였던 기억을 바탕으로 나는 진희웅 작가의 '소통'에 주시하기로 한다.
"누구나 가볍게 지나치거나, 잠시동안의 거처이거나, 하지만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장수목과 같은", 그가 잠재된 기운, 흔적으로서 주름을 그려왔던 바는 사물과 사물이 만들어내는 묘한 주관적인 분위기에 감정이입을 한 바다. "흔적만이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작가의 의식은 기본 '소통이란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을 바탕으로 한다. 한참을 노력해보았지만 언어사용자들에게서 진정 무엇이 통했다 라든지, 서로 이해할 수 있었다 혹은 내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확신하기 실상 쉽지 않았던 경험이 작가에게는 많아 보였다. 그래서 소통의 대상과 방식을 사물과 보이지 않는 것, 행위 등 직접적 언어소통이 불가한 사물들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그의 작업들이 꾀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작가는 흔적에 대한 기운과 그것이 사물과 결합되는 묘한 분위기를 표현해왔던 페인팅 작업을 거쳐, 있건 없건 이해도와 밀접히,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의식을 차갑게 되짚으며 그냥 지나쳐왔던 것에 대한 감지를 주 내용으로, 일련의 설치작업들을 선보인다. '제발 나를 봐주세요 혹은 나도 있었다' _당신이 지나쳐왔던 '나', '나'의 관심, '나'만큼이나 조용히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사물들, 흔적의 분위기. 그냥 지나침 자체가 소통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그의 주목은 주목하지 않았던 것을 탐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직접적으로 그는 언급한 바 없다. 보기에, 작품의 형식과 표현에서 그가 단지 분위기를 그려내는 것만으로, 사물을 감지하여 그 존재를 드러내는 표현인 것만으로 그의 작업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형태와 이에 접근하는 작가의 의식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일련의 페인팅에서 보여주는 주름의 형태는 벡터적이거나 무정형의 움직임이 아니라 일정 흐름으로 그것이 주름임을 명시하듯 표현된다. 연계선 상에서 '구석', 공간의 형태를 일차적으로 잡아주는 기본 틀이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야와 관리에서 항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는 공간의 구석, 그것이 지닌 형태를 작가는 오브제 설치로 강조하고 있으며, 2011작 단채널 비디오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쓰레기 봉투에 주워담고 다시 펼치고, 또 주워담고 다시 펼치는, 결국 쓰레기 봉투가 헤지고 터져 담을 수 없는 형국에까지 의미 없는 반복행위를 지속하고 있으나, 왠지 마무리가 깔끔하다. 딱딱하고 규칙적인 표현과도 같은 그의 작업이 지닌 구조들은, 작가로 하여 미시적인 것들에 대한 관찰, 탐구, 감지, 발견을 꾀하게끔 하는 것으로 지금 현재 그가 예술가로 성장해가는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작가 진희웅과의 대화가 정말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불안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는 불편한 과정들, 진정 부르짖지 못하는 소통에 대한 아쉬움이 되려 그의 시선을 미시적인 것으로 보다 집중하도록 이끌었다고 믿는다. 허공에 내뿜는 거들먹거림보다도 탄탄히 자기 행위의 이유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구조적인 일관성이,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나, 분명 있었다. 더불어 나는 의미심장한 작업 내용을 떠나서라도 그만의 관찰력과 찰나의 발견, 이를 예술행위로 연결시키는 자기 근거에 대해서 그가 보다 확신을 지니고 서길 바라고 있다.
마지막으로 진희웅이 말해왔던 소통의 시작, '그냥 지나침'에 대해서,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길을 걷다 마주친 찰나, 한 순간에 대해서 과연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를 감탄케 하는 작품이다.
거리는 내 주위에서 귀가 멍멍하게 아우성치고 있었다.
갖춘 상복, 장중한 고통에 싸여, 후리후리하고 날씬한
여인이 지나갔다. 화사한 한 쪽 손으로 꽃무늬 주름장식 치맛자락을 살포시 들어 흔들며,
(..중략.)
한 줅 번갯불.. 그리고는 어둠!
-그 눈길로 홀연 나를 되살렸던, 종적없는 미인이여.
영원에서밖에는 나는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하련가?
저 세상에서, 아득히 먼! 너무 늦게! 아마도 영영!
그대 사라진 곳 내 모르고, 내 가는 곳 그대 알지 못하기에,
오 내가 사랑했었을 그대, 오 그것을 알고 있던 그대여!
- 보들레르, '지나가는 여인에게'<수록_악의 꽃>
<끝>
2012년 1월 3일 화요일
self portrait.
I did not draw by my self portrait since a long time.
Now i use my IPhone as a my brush sometime.
Now we are everywhere, everytime exposure to every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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